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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패치] Merry Christmas Darling!

write. 다온(@DAON_101)

 

 

 

***

 

 

 

  내 소개를 하자면 이름은 패치, 올해로 스물 여덟 살, 벌써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 부서는 모바일 게임, 직급은 대리. 아직까지는 잘릴 염려도 없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 번듯한 회사원이란 말이지.

 

  이런 나를 여덟 살 먹은 애처럼 보면서 ‘꼬맹이’라는 별명인지 애칭인지로 날 부르는 저 ‘아저씨’와 음, 그래애…, 진지하게… 진, 지하게에…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교제하고 있는 중이다. 낯부끄러워서 사귄다는 말은 못하겠다.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사, 귄다고 말하는 건 좀 부끄럽잖아?

하여튼, 그렇게 연인… 아니, 애인…? (아, 진짜 부끄럽네!) 어쨌거나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한 지는 오늘까지 세면 딱 97일째고 3일 지나면 100일이다. 그리고 그날은 크리스마스다. 하아.

솔직히 저 아저씨가 이날 고백하면 100일 후면 크리스마스란 걸 알고 그 날짜에 딱 맞춰서 고백한 것 같진 않다. 저 나이 먹어서 뭘 알겠냐마는, 하여튼 그렇다. 아 물론, 나도 그런 걸 일일이 세면서 기다리거나 한 건 아니다. 어쩌다 보게 알게 된 것이지. 정말이다!

 

  그치만 나는 이런 것에도 기대를 품어 버리고야 마는 바보 같은 꼬맹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100일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무지무지 특별하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여덟 살 먹은 꼬맹이처럼 바보 같고도 유치한 설렘과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저 아저씨가 뭘 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보면 항상 머릿속에는 신제품 개발에 보고서, 잡다한 논문, 담배밖에 없는 것 같은 저 아저씨가. 나랑 연애 아닌 연애를 하기야 한다마는 그 외의 다른 달콤한 상상이라도 할 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 그래. 다 좋아. 아저씨가 할 것 같지 않으면 내가 하면 된다. 연하의 패기를 이 때 보여줘야지 언제 보여주겠나? 게다가, 아저씨는 날 아직도 꼬맹이로 생각하는지 97일이 지났는데도 이놈의 진도는 도대체 언제 나가는지 속이 타 들어가서 죽을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생각해봐라. 손잡고 포옹하는 건 솔직히 사귄 지 하루만에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뽀뽀나 키스는 몰라도. 생각해보니까 좀 속 터지네 아니, 키스도 두 달이나 지나서 겨우 허락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딨겠냐고?

 

  아저씨 연애 철학에 대해서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 이제 19금 마을에 있던 어린 꼬맹이도 아니라 알 거 다 알고 자란 어엿한 성인이고, 아저씨랑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연인 관계인데.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그래그래 그런 예쁘고 아름답고 순진무구한 말 다 좋지만 나는 그 이상도 좋단 말이야. 직설적으로 말해야 할까? 손잡는 것도 좋고, 포옹도 좋고, 키스도 좋고, 좋고……, 좋고, 다 좋다고…… 아 몰라. 이걸 내가 말로 일일이 설명해야하나?

 

  제발 크리스마스에는 날 아껴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아주 칼 갈고 준비해야겠다는 그런 이상한 자신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남자가 한 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모든 것은 100일을 위해서…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연인 사이로 처음 맞는 기념일은 좀 특별하게 챙겨야 하지 않겠어? 저저저 머릿속에 일 밖에 안 든 것 같은 매뉴얼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뭐라도 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라고 일단 호언장담은 했건만 사실 무슨 일부터 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사실 말하자면 이렇게 진지하게 누군가랑 연… 애라는 걸 해 본 적은 처음이란 말야. 애초에 연애에는 관심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으니 내가 하리라고는 예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난 모든 것에 서투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나, 매뉴얼에게만큼은 연애에 있어서는 꼬맹이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어른 대 어른으로. 성인 대 성인으로! 능숙하게, 여유롭게 마음먹고, 리드하는 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얕잡아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말이 길었네. 일단은 사전조사부터 해야겠지.

 

 

  그래서 검색해 본 것이 남자친구 크리스마스 이벤트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하다. 그렇지만 직설적인 단어로 검색을 하고 조사를 해야지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검색어로 검색을 해 본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는지 연관 검색어며 추천 검색어로 바로 뜨는 것을 보며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어디 어떤 이벤트를 하는지 좀 볼까… 하는데…

 

  잠깐만 저기, 이게 뭐야? 산타걸?

 

  허벅지는 물론이고 팬티까지 보일 정도로 아슬한 치마에 귀여운 방울까지는…, 그래, 좋았는데 스크롤을 더 내려보니 그냥 가슴만 슬쩍 가린 헐벗은 사진이 왜 이렇게 쏟아지는지 적나라한 꼴에 그만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가 저걸 입는다고… 절대 못 해. 못 해. 그냥 못 해.

 

  차라리 다른 걸 먼저 생각해보자. 그래, 얼마나 진도를 뺄 건지. 진도란 말이야 자고로 분위기를 잘 타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닌 분위기가 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단 말이지. 그렇지만 잠깐,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끝까지 빼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분위기고 무드고 기분이고 뭐고 됐고 그냥 부딪히는 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입술부터 부딪히지 뭐. 그 다음은 나나 매뉴얼이 알아서 해 주겠지. 그래, 해결.

 

  음, 그럼 콘돔도 이벤트용 콘돔 같은 걸 사야 하나? 좀 웃기긴 한데. 이벤트용 콘돔… 크리스마스 콘돔. 뭐가 되게 많은데. 향기나는 콘돔도 있고, 컬러 콘돔도 있고, 돌기 있는 콘돔도 있고, 따뜻해지는 콘돔도 있고, 요즘 시대가 좋아지긴 좋아졌구만. 오… 형광 콘돔도 있네…

 

  형광 콘돔…은 안 돼. 이불 밑에서 번쩍번쩍거릴 그… 걸 생각하니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깨질 것 같았다. 분위기가 아니라 위기만 남을 것 같단 말야 그 반짝거리는 걸 어떻게 집어넣겠… 됐다. 평범한 걸로 가자. 그런데 아저씨 사이즈가 얼마나 되려나? 애인 사이이긴 하지만 한 번도 잔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얼핏 봤을 땐 드러나는 윤곽이 장난 아녔는데… 아저씨 자지 사이즈가 몇이야? 아니, 잘못 말했어 바지 사이즈가 몇이야 하는 농담 같지도 않은 말하면서 은근슬쩍 물어볼 수도 없고 하 이것 참. 이런 걸로 고민할 줄은 몰랐는데. 죽죽 내리던 스크롤을 멈춘 채 나는 정말이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이즈 작은 걸 사면 산 보람도 없이 찢어질 거고 그렇다고 큰 걸 사면 헐렁할 거고 아저씨 자존심도 무너질 거고. 이따가 화장실 같이 가서 확인해 봐? 근데 나 너무 대놓고 쳐다보다가 들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수치스러울 것 같은데.

하다가 내린 결론이… 아저씨라면 없이 해도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자, 그럼 이 문제도 해결.

 

  아니 그런데 속옷 사이트 몇 번 들어갔다고 팝업창은 왜 뜨는 건지 얼굴이 홧홧해서 죽을 뻔했다. 보기에도 낯부끄러운 여자 속옷 광고 팝업창이 하도 뜨는 바람에 허겁지겁 작업창까지 닫아버려야 했다.

 

  아무튼 나,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정통 산타 복장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루돌프? 산타걸? 아니면, 슬립? 아니면, 이벤트 속옷? 아니면… 그냥 다 벗어버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이미 퀸카로 살아남는 법 레지나의 산타걸 복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허벅지쯤에서 달랑달랑거리는 치마라던가 귀여운 산타 모자는 또 왜 이렇게 깜찍해보이는지.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그러다가 문득 검게 변한 모니터에 내 얼굴이 비치는데 이 몰아치는 현타는 또 뭐야? 허리만 살랑거려도 상큼함이 묻어 나오는 깜찍한 레지나는 어디 가고 피곤에 찌든 스물여덟 먹은 회사원이 퀭한 눈빛으로 마우스만 딸깍거리면서 앉아있었다…

 

 

 

  “하…….”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잠시만.

이 무슨 부귀영화를 부리겠다고 이런 하이틴이나 보고 있었나 싶어 그냥 노트북을 탁 소리나게 닫아 버렸다.

 

  생각해보자. 패치야. 넌 스물여덟 살이고 아저씨는 그것보다 나이는 훨씬 많다. 그말인즉슨 나말고도 다른 애인을 몇 번이나 사귀어 보았을거란 뜻이고, 그 애인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 일도 많았을 거란 뜻이다. 당연히 온갖 야시꾸리하고 기상천외한 이벤트는 다 받아봤겠지.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야…♡ 라는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는 선물 이벤트는 당연할 거고, 야한 속옷을 입고 유혹하는 것도, 귀엽게 산타나 루돌프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전부 받아봤을 게 뻔했다.

 

  근데 나는… 말마따나, 나는 내세울 게 없다. 고개를 숙이면 향긋한 샴푸 향과 함께 쏟아지는 긴 생머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수박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골반도 없고, 허리는 잘록하지도 않다.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도 없고 누굴 유혹할 수 있을 만한 뭐랄까, 섹시한 스킬? 건드리기만 해도 애인이 자지러지는 농염한 기술? 그런 것도 없다. 도대체가 갖고 있는 게 없는데 내가 뭘 하겠다고 이렇게 들떠가지고는 찾아봤나 모르겠다. 꾸며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뭔가 생기는 것도 없을 텐데. 만져지는 것도 없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쓸데없이 들뜬 내가 바보지. 됐다. 그냥 평범하게 가자.

 

 

 

***

 

 

 

  “자, 크리스마스 선물.”

  “엉? 뭐야? 시계?”

  “응.”

 

 

  그래서, 결국.

  내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 겸 100일 선물은 시계였다. 적당히 무난하고 적당히 평범한, 크리스마스에 애인한테 줄 만한 선물로 딱인. 장미꽃이니 향수니 그런 선물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용성이 있는 선물이 낫지 않을까 해서 고른 것이었다. 나름 매장에 가서 직원 추천까지 받아 내가 보기에는 제일 잘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골라본건데 사실 매뉴얼 손목에 무슨 시계인들 안 어울리겠냐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이 아저씨가 참 잘나긴 했어.

 

 

  “뭘 이런 걸 다 샀어? 괜찮은데.”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시 주던가.”

  “야. 줬다 뺏는 게 어딨냐? 자… 채워줘.”

  “혼자 못 해?”

  “응.”

 

 

  그러니까 해 줘. 하면서 손목까지 내미는 건 또 뭐람. 잘나면 뭐해. 혼자 시계도 못 차니 말야. 물론 진짜 못 차는 건 아닐테고 이것도 장난이겠지만, 그래도 난 얌전히 시계를 채워 주기로 했다. 알아서 하라고 할 만큼 내가 그렇게 모진 사람은 아니라. 잠자코 시곗줄을 채워 주고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데, 예상대로 참 잘 어울렸다. 진열대에 있을 때보다 매뉴얼 손목에 달려 있으니 훨씬 나아 보이고 말이야. 나도 직원도 보는 눈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잘 골랐네… 고맙다 꼬맹아.”

  “고맙기는.”

 

 

  자, 어찌되었거나 이걸로 선물 교환식은 끝. 매뉴얼의 선물도 비슷한 결이었다. 솔직히 매뉴얼이 케이크만 사 왔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날 생각해서 사온 것일 테고, 그 선물을 고르는 내내 날 한 번이라도 떠올렸을 테니까. 그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기분 좋았다. 그냥 날 위해 무언가를 고르고 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완전, 완전 만족스러우니까.

 

  매뉴얼이 사 온 선물 중 하나인 와인을 테이블에 잘 어울리도록 세팅하다가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매뉴얼이 미리 호텔을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내내 이곳에 있기로 했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즐기는 크리스마스도 참 좋은 것 같다. 굳이 사람 많은 시내에 나가고 싶지도 않고. 롱패딩 두른 채로 밖에 나가 인파에 휩쓸려서는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고 상점에서 시끄럽게 쏟아져 나오는 캐롤만 듣는 건 으, 완전 사양이니까. 트리를 보고 싶으면 호텔 로비에 있는 트리 보면 되고, 캐롤이 듣고 싶으면 휴대폰으로 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따뜻한 호텔 안에서 룸서비스 시켜서는 맛있게 먹으면서 말이다.

 

  다 됐고, 솔직히 그냥 이 나긋나긋한 분위기를 즐기며 이러고 있다가 영화 채널에서 틀어 줄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나 한 편 때리고, 와인이나 나눠 마시고 (물론 나는 술이 약하기 때문에… 정말 정말 약하기 때문에, 아마 마셔도 한 모금만 마시겠지만, 나머지는 매뉴얼이 죄다 마셔버리겠지만) 적당히 알딸딸한 취기에 어울려서 나른해지고 따끈해진 몸뚱아리를 매뉴얼한테 기대고만 있어도 나 정말 행복할 거란 말이지. 뭐 다른 연인들은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이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진도에 급할 게 뭐가 있겠어 섹스 안 하면 죽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니 매뉴얼만 있으면 다 좋았다. 이렇게 가만히 말없이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좋은 걸.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어차피 사귀다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하게 되고야 말 텐데 뭘 그리 조급하게 굴었나 싶다. 이거,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완전 밝히는 애처럼 들리는데… 애취급 받기 싫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노트북 앞에서 이것저것 이벤트용 코스프레 옷 고르다가 제대로 현타 맞은 사람은 또 누구고. 그 때를 다시 생각해보니 코스프레 옷은 안 고르길 백 번 천 번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은 어른스럽게 크리스마스든 100일이든 즐기자 이 말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귀엽고 깜찍한데다 손바닥 만한 옷을 입고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도록 구니 뭐니, 그런 건 다 때려치우고 말이다. 막말로 그렇게 입어봤자 나는 레지나처럼 귀여워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자, 그런 생각은 이제 접고.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 치우고. 간만에 온 휴일, 단둘이 있게 된 건 또 얼마만인가. 이 소중하고도 귀중한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매뉴얼한테만 집중해도 아쉬울 이 시간을 아껴쓰려고 했다.

 

 

  …정말 집중하려고 했다.

  정말 건전하게!

 

 

  “그럼 영화나 볼까?”

  “영화 좋지. 영화 좋은데.”

  “왜?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있어?”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해서.”

  “무슨 할 말?”

 

 

  해서, 크리스마스에는 으레 재밌는 특선 영화를 틀어주기 마련이니까, 이제 저 포근해보이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 채널이나 좀 돌려보려고 마악 생각했을 때였다. 나홀로 집에도 좋고 해리포터도 좋고 러브 액츄얼리도 좋으니까. 보면서 얘기나 하다가 맛있는 거나 나눠먹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말이야.”

 

 

  근데… 그런데그런데그런데, 그냥 사이트에서 보고 지나쳤던 이벤트용 코스프레 옷이 왜 매뉴얼 손에 버젓이 들려있는지를 유추해내려면 나는 정말이지 머리를 빠르게 돌려야 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저게 왜 아저씨한테 있는데? 난 배송시킨 기억이 없는데 아저씨가 저걸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뭐지? 뭐야?

 

 

  “나한테 노트북 빌려준 거 잊어버렸구나?”

  “미친.”

  “하도 노트북에 광고팝업이 뜨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난 우리 꼬맹이가 이런 깜찍한 짓을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

  “아니야!”

 

 

  깜짝 놀라서 냅다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그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왜 까먹고 있었을까 내가 그대로 노트북 화면을 닫아 버렸다는걸 그래. 그 야한 팝업 뻔히 뜨는 걸 새까맣게 까먹고는 아무 생각없이 빌려줬다는 걸 이제야 생각해 낸 바보가 여기 있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필요 이상으로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움인지 부끄러움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아무튼 그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는 얼굴이 다 홧홧해지는데, 그런 나를 보고도 매뉴얼은 무슨 속셈인지 빙글빙글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굴고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안 입어 줄거야?”

 

 

  대신 사오기까지 했는데?… 라는 뒷말은 들을 것도 없고, 내 시선은 이미 매뉴얼이 들고 있는 그 옷에 박혀버린 지 오래였다. 달랑달랑거리는 그 치마…… 방울까지 달린 귀여운 그 산타 모자…… 도저히 못 입는다 안 입는다 하고 집어 치워버린 그 코스프레 옷… 무슨 표정을 내가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겠구나 싶었으나 겨우 옷에서 시선을 떼고 매뉴얼을 바라보았건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매뉴얼의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매뉴얼이랑 같이 있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창밖 풍경이나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디로 가고 나는 다시 크리스마스 3일 전 노트북 앞에 앉아 마우스 스크롤만 드륵드륵 내리던 그 애새끼가 되어 있었다…

 

 

  “그걸 왜……”

  “우리 패치가 좀 바쁜 것 같아서 내가 대신 준비해봤지.”

 

 

  라니 정말 어이가 없으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검색하다가 관둔건지도 모르면서. 착잡해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모르는 게 틀림없어보이긴 했지만) 매뉴얼은 요지부동이었다.

 

 

  “……있, 잖아, 아저씨.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입어도 레지나는 못 돼.”

  “걔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난… 금발 생머리도 아니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난 금발이 아니라 빨간 머리가 취향인걸. 하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매뉴얼을 보며 나는 더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 진짜. 이 아저씨가 진짜. 다른 의미로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죄 없는 입술만 꾹꾹 씹었다. 이렇게 될 줄이야 정말 몰랐는데. 매뉴얼 손에 들려 있으니 더더욱 묘해 보이는 옷을 뚫어져라 보다가 괜히 헛기침만 해댔다. 이벤트고 뭐고 제대로 되는 것 같은 느낌이 하나도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사뭇 진지하게도(도대체 왜?) 한 손에는 코스프레 옷을 받혀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매뉴얼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사오기까지 했는데 한 번쯤은 입어봐도 될 것 같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이랑 함께…

 

 

  “…그, 그렇게 보고 싶어?”

 

 

  하고 눈 딱 감고 말하자마자 후회했지만. 후회했지만… 아니야! 다시 취소할게 내가 그거 찾아 본 이유는 따로 있다고 즉석에서 뭐라도 지어내려고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보려는 찰나였건만…매뉴얼의 대답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니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건, 곧바로 입술부터 부딪혀 버린 것밖엔 없다는 뜻이다.

 

 

 

***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결과는? 좋았다. 것도 무지무지 좋았다. 하나하나 떠올리기는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은 못하겠다만, 아무튼 좋았다. 옷가지고 고민했던 게 우스워질만큼. 그렇게 고르고 골랐건만, 치마며 속옷이며 아마 침대 밑 어디쯤에 대충 벗겨져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냐, 불은 다 끈 채로 얼굴 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은 역시나 매뉴얼이다. 맨 살갗에 와닿는 매뉴얼의 손길은 따뜻하기만 하다. 나는 모른 척 이불을 더 끌어당기면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무 생각도 안 해.”

  “부끄러워서 그래?”

  “아니거든?”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거든!… 하고 바로 이불도 내리고 고개도 돌리고는 냉큼 대답하는데 코앞에서 매뉴얼이 웃고 있었다. 아차하자마자 그대로 매뉴얼이 허리를 꽉 잡아버리고는 돌려버리는 바람에 매뉴얼과 마주보고 눕게 되었다.

 

 

  “그럼 뭔데?”

  “나도 몰라.”

 

 

  무슨 생각을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생각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짜증난 것도 아니지만 어찌됐건 간에 생각 정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자꾸 매뉴얼이 자꾸 시선을 마주쳐오는 바람에 잘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에 눈동자만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하고 있는데, 매뉴얼이 문득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꼬맹이 니가 해 줘서 좋았던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라서 좋았던 거라고.”

  “그러니까 뭐가 말야.”

  “알면서 묻는 거 봐라. 그거 말이야, 여ㅈ…”

  “! 말하지 마.”

  “자기가 물어봤으면서 뭘 또 말하지 말래?”

 

 

  그러면서 내 코끝을 살짝 꼬집으면서 피식 웃는 게 아닌가. 왠지 모르게 얄미운 마음에 입은 다물고 말없이 매뉴얼을 노려보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또 이상하게도 기분이 풀려 버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채버린 것 같은 눈을 보니 말이다. 겨우 그 한 마디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데도 제멋대로 올라가버리는 걸 봐도 그렇다. 좌우지간 나도 참 단순한 면이 있는 것 같다. 3일 전부터 지금까지 했던 고민이 무색할 만큼….

 

  거기까지 생각하자 정말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아져서 안 웃으려고 깨물고 있던 입술도 힘주고 있던 눈에도 힘을 풀어버렸다. 참으려고 했던 게 무색하게도 웃음이 자꾸 나오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몰라. 이제 그만 말해.”

  “왜? 이렇게 귀여운 애인을 둬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받고 너무 좋은데.”

  “아저씨 취향 변태 같은 거 누가 몰라.”

  “내가 말한 건 시곈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

  “우리 패치가 해 주는 거면 안 좋은 게 없는데 어떡하라고?”

 

 

  하면서 아주 한 마디를 안 지고서 말하는 거 보니 정말 왜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그러고 있든 말든 언제 다가왔는지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매뉴얼은 아직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어져서, 그냥 마저 웃어버렸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아직까지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캐롤도, 비춰 들어오는 빛도, 전부 그대로였다. 안온하고도 평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분위기. 그리고 이 모든 걸 같이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매뉴얼이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짜 맞춰진 크리스마스 선물같이 느껴졌다.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다 패치야.”

  “다 늦은 마당에 무슨… …아저씨도.”

 

 

  어찌됐던 간에 처음으로 둘이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전날에 느꼈던 바보 같은 설렘과 기대감에 딱 부합했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안락함에 눈을 감아버리며 나는 매뉴얼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크리스마스의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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