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orget me not
w. 겜브
0.
그 기억은 전조증상 없는 해일처럼 매뉴얼을 덮쳐왔다. 뻔한 일일연속극, 신파 드라마에서 보는 것 같은 극적인 전환점은 없었다. 그 날, 매뉴얼은 검금 복구 후 4년째의 크리스마스를 그날의 희생자들과 덤덤하게 기념하고 일찍 집에 들어왔다. 4년이나 지났으면 검금을 겪지 않은 세대와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도 되었다고 하지만, 복구되기 전까지의 공백, 그 공허함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아무래도 그 시기를 직접 겪어본 사람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집이 매뉴얼을 반겨주고 어슴푸레한 어둠 사이에서 그는 불을 켜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출근 전 탈의실에서 작업복과 가운으로 갈아입는다고 해도 그는 출근길에서조차 정석을 따르는 편이었다. 여느 일반 사기업에서 일하는 사원과 다르지 않게 정장을 입고 출근한 그는 퇴근할 때도 같은 정장차림 그대로, 마이와 넥타이를 벗어 도로 행거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는 오로지 매뉴얼의 법칙만이 존재했다. 담배 냄새가 난다고 불평할 아내도, 간접흡연으로라도 담배의 영향을 받게 하고 싶지 않은 자식도 없는 매뉴얼은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몸을 길게 빼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가 애용하던 지포라이터가 오늘은 무슨 바람에서인지 전혀 불을 지피지 못했다. 작게 욕을 짓씹은 매뉴얼은 곧장 옷장으로 걸어갔다. 오늘 같은 날은 유난히 찝찝하기도 했고, 평소 같았으면 참았을 담배를 오늘만큼은 참고 싶지 않았다. 창밖으로 제각기 다른 일루미네이션으로 꾸며진 작은 주택들과 캐롤송이 들리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저번주였나, 주말에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가 취한 김에 받아온 대리운전 라이터가 사복 주머니 안에 있을 것이다. 옷장을 열고 그는 주말 이외에는 굳이 입지 않던 검은색 추리닝의 주머니를 뒤졌다. 죽으라는 법은 없네. 실실 웃으며 라이터를 꺼내던 그는 그 순간 기억해버린 것이다. 잊고 있었던 사람의 얼굴을. 어쩌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바닷물이 달에 의해 이끌려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 처럼,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으로 매뉴얼은 다시 기억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길든 짧든 어쨌든 이유가 있기에 일어나야만 했던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마치 밀물이 몰려오듯 한꺼번에 기억이 덮쳐왔다.
1.
"깨어난 것, 축하하네."
"어... 어 그래. "
매뉴얼은 어색하게 크레인으로부터 과일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과일 바구니 말고도 매뉴얼의 병실에는 온갖 꽃들이며 화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은 매뉴얼이 만든 명찰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여러 단체의 감사 화환이었지만, 매뉴얼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꽃다발도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기분은 좀 어떤가?"
"그런 걸 묻냐? 아직 실감도 안 나는구먼."
"그런가...."
크레인은 비치된 의자에 앉아 오랜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 금요일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매뉴얼의 시간은 마치 12년전 검은 금요일이 일어났던 때에 멈춰버린듯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어도,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가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기억은?"
"뭐…. 드문드문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세상 살면서 자기가 했던 일을 다 기억하고 그르겠냐. 완전 말짱한데?"
그 말에 크레인은 그제야 안심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영웅들이 열었고, 그들은 검은 금요일에 희생된 사람들을 복구하는 것까지 성공했으나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살아 돌아온 사람들 중 신체적 상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상해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왔다. 복구된 사람들은 모두, 기억 일부를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소중한 사람을 잊은 사람도 있었고, 소중한 일을 잊은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해서 완전히 쓸모없는 기억을 잊은 사람이나, 괴로웠던 일들을 잊은 사람도 있었고, 만년필은 항상 둘째 서랍에 넣는다거나 하는, 다시 배울 수도 있고 잊는다 해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을 잊기도 했다. 복구 이후 일주일 내에 정신을 차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컨티뉴를 비롯한 연개부원들은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1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매뉴얼 같은 경우에는 2년이 다 지나도록 혼수상태였고, 정신이 든것이 바로 사흘 전이었다. 따라서 모두가 매뉴얼에게 심각한 휴유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말짱해 보였다. 몸도, 마음도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 것 같군."
"어어."
매뉴얼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크레인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뒤적였다. 어제 오늘 난리도 아니었어. 아이돌 따로 없었다니까?
"....전부 다 아는 사람이었나?"
"돌려 말해지 않아도 돼. 찾아온 사람 중 기억 안 나는 인물은 없었냐고 묻고싶은거 아냐?"
"..."
"없어. 없어. 그러니까 그만 걱정해. 쌩쌩함 그 자체니까."
"....그렇군."
크레인은 매뉴얼의 말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착잡함에 괜히 자기 손을 만지작거렸다. 친구의 기억이 온전하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지만, 기억이 온전하기에 전하기 어려운 말도 있었다.
"저, 매뉴얼."
"어엉? 왜. 주스 달라고? 저기 사파 대장이 사 온 뽕즙 있다. 알아서 마셔. 아니다. 상자째로 들고 가."
"그게 아니라…."
"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래? 그냥 말해! 솔직하게 오픈업!"
"패치 팀장.. 일일세."
무거운 이름을 뱉으며 크레인이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크레인은 매뉴얼이 패치에게 얼마나 각별한 존재였는지를 알았다. 2년간 병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들락날락했던 패치였다. 그가 매뉴얼에게 그렇게나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패치 역시 매뉴얼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임을 알았다.
".......?"
"....자네가, 연구개발부서로 좌천되었던 이유가 그라는 것은 나도 안지 얼마 안 되었네. 몇년만이라 낯설겠지만 놀랍게도 그가 이번 복구의 주역 중 한명이라네. 반갑겠지. 만나고 싶겠지. 그런데....."
"뭐,"
"...... 패치 팀장이.... 어제 사고를 당했다고 하네... 뉴스에서 봤을지도 모르지만..."
"잠깐…."
"이 병원에 입원해있다고 하네. 꽤나 중상이었고 사고를 낸 사람은 현장 체포되었으니 그건 걱정 말고. 아직 혼수상태지만…. 최고의 의료진들이 붙어있으니 괜찮을 거야. 어제 말해주고 싶었는데 자네 상태도 불안정했고 패치 팀장 수술도 있어서…. 그렇지만 며칠만 지나면 자네의 방문도 허락할 수 있게 내가 힘 좀 써보겠…."
"아니, 잠깐. 잠깐만. 야."
심각하게 듣고 있던 매뉴얼이 갑자기 손사레를 치며 크레인의 말을 잘랐다. 차마 매뉴얼을 보지 못하던 크레인이 고개를 들자 얼굴 가득 당혹감이 가득찬 매뉴얼의 얼굴이 보였다. 보는 사람도 착잡하게 만드는 얼굴에 크레인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찰나였다. 매뉴얼의 입에서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냐? 그 패치 팀장이라는 사람......"
2.
검은 금요일에서 복구된 후 매뉴얼은 아무런 육체적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2년간 누워만 있던 세월은 그의 몸에도 부담을 주었기에 매뉴얼은 한동안 보행을 도와주는 보조 기구에 의지해야만했다. 2년이나 누워있었기에 욕창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했지만 신기하게도 매뉴얼의 몸은 근육이 빠져 힘이 없는 것 빼고는 혼수상태였던 사람인 것 치고는 양호했다.
"매뉴얼 아저씨, 오셨어요."
"어...어, 사파 수장 딸."
"퍼블리라니깐요."
조금 불편한 몸을 이끌고 1인 병실에 들어가니 침대 옆의 의자에서 밤을 새운 듯한 퍼블리가 그를 맞아주었다. 며칠 전 퍼블리가 컨티뉴와 함께 인사를 온 덕에 구면이긴 하지만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 없는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며칠 전 매뉴얼을 찾아왔을 때는 활달하고 행복해 보이던 퍼블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자 분위기가 더욱 칙칙해지는 듯 하다. 그저 조용히 숨만 쉬는 와중에 협탁에 놓인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서 있기도 뭐하고 다리도 아픈 매뉴얼은 퍼블리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시선을 올려 물끄러미,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큰 상처를 입었는지 얼굴에 덕지덕지 거즈며 반창고가 붙여져 있어 제대로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머리카락만은 예쁜 붉은 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한테 그렇게 각별한 존재였다고.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바라보는 것 같은 죄책감에 매뉴얼은 괜히 멋쩍어졌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색한 침묵을 뚫고 퍼블리가 묻자 매뉴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멀쩡하다. 2년간 누워있던 것 치고는 정말 괜찮은걸."
"하하..."
"욕창도 안 생겼고, 몸이 뻣뻣하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이거 뭐, 혹시 검은 금요일의 영웅이라고 해서 24시간 간병인이라도 붙여준거야? 좋은 일 하고 볼 일이다 진짜."
"......."
매뉴얼의 말을 듣던 퍼블리가 고개를 떨구었다.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한 말인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매뉴얼은 조금은 과장되게 자신의 건강함을 어필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괜찮니?"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팀장님이었어요."
"....어…?"
"낮에는 간병인을 쓰긴 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전부 패치 팀장님이었어요."
"......"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도르륵 하고 떨어진다. 매뉴얼이 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퍼블리는 잠깐 죄송합니다. 따라오지 말아주세요! 를 외치며 병실에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병실에서 매뉴얼은 퍼블리를 쫓아갈까 하다, 애초에 잘 모르는 사람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례인 것을 알기에 누워있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 크레인에게 여러가지 설명을 들었었다. 매뉴얼과 패치,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 패치의 상태에 대해서 말이다. 검은 금요일 복구의 주역 중 한 명인 패치는 2년간 매뉴얼의 곁을 한시도 빼놓지 않고 지켰다고 했다. 하지만 동안의 피로가 누적되어 매뉴얼이 깨기 단 몇시간 전에, 의사와 퍼블리의 권고에 따라 겨우 집에 돌아가 거진 두 달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잤다고 했다. 그렇게 매뉴얼이 깬 다음날까지 숙면을 취한 패치는 100개가 넘는 퍼블리의 부재중 전화에 놀라 서둘러 매뉴얼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갔고, 달려가는 와중에 갑자기 인도로 차를 들이받은 운전자 탓에 사고가 났다는 것이, 비극의 전말이었다. 피의자는 명백히 고의로 패치를 노려 사고를 냈으며, 역시 중상이라 치료가 끝난 후에 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매뉴얼은 복잡한 얼굴로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지켜봤다.
"이해할 수가 없구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잔뜩 거즈에 가려지고, 드러난 부분까지 부어있는 데다가 산소호흡기도 부착되어있어 원래의 얼굴을 거의 확인할 수 없는 그 사람을 보면서 매뉴얼은 한없이 복잡한 감정에 잠겼다. 19금 마을에서 일한 기억은 난다. 그곳에서 어떤 부조리함을 느끼고 저항해서 좌천된 곳에서 명찰 연구를 했다는 것까지 기억이 난다. 동기는 흐릿했지만, 결과는 명확했기에 매뉴얼은 크레인에게서 이야기를 전달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억에 구멍이 났던 것마저 인지하지 못했었다. 옛 기억들을 곱씹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정년을 앞둔 상사를 때린 기억 같은 것이 의아했지만 매뉴얼에게는 잘 떠오르지 않는 예전의 기억들보다 현실에 훨씬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픽셀 그래픽에 대한 차별. 새로운 게임들의 개발, 검금 복구의 과정이나 무엇보다, 2년간 굳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몸이 매뉴얼의 사고를 차지했다.
"....."
과거에 단순히 알고 지냈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간호해야 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매뉴얼이 19금 마을에서 근무 중일 때 알고 있었던 사이라면 적어도 매뉴얼이 복구되기까지 10년은 족히 떨어져 있었을 텐데. 애초에 매뉴얼은 그 마을에서 몇 개월 지내지도 않았다. 그사이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패치는 몸이 다 상해가면서까지 매뉴얼을 간호했고 매뉴얼에게 가는 사이에 사고를 당한 것일까.
“이상한 놈.”
그런 것은 차차 물어보면 될 것이다. 빨리 나아라. 성한 곳이 없는 병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매뉴얼은 괜히 중얼거렸다. 날이 춥다. 더 추워지기 전에 깨야지.
3.
매뉴얼은 다음 날도 패치를 찾았다. 아직도 그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지금껏 줄곧 매뉴얼을 간호해 온 그에 대한 예우였다. 누워있는 남자는 아직도 미동도 없다. 오늘은 사파 수장의 딸이 아닌 간병인 한 명이 그의 곁을 지켰다. 매뉴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간병인이 병실을 비우려는 찰나, 매뉴얼이 잠시만요, 하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기 말입니다, 간병인 선생님.”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했더니 매뉴얼 선생님 아니세요!”
그녀는 화색을 띄우며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누워계실 때만 뵜더니 신수가 훤-해보이시네! 그녀의 외침에 매뉴얼이 의뭉스러운 눈을 했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이지요! 병원에 오시고 첫 한달 간병은 제가 했는걸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기억하고 있죠. 호호호.”
“아…. 실례 많았습니다.”
“호호…. 흠흠,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어색해하는 매뉴얼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자주 오는 푸른 머리 아가씨 있지 않습니까. 그 아가씨랑 저 청년과 관계가 어때 보이시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뭐 있잖습니까, 애달프다거나, 애처로워 보인다거나...”
“아~ 퍼블리양! 무슨 걱정인가 싶었더니, 둘이 바람 난 게 아닌가 걱정하시는 거....?”
예? 매뉴얼이 펄쩍 뛰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자랑스러운 옆머리도 위로 삐죽 솟아오른 것 같다. 바람이라니, 정곡을 살짝 비껴갔지만 찔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 대한 패치의 헌신은 부모 혹은 연인에게 하는 것에 가깝다는 결론에 다다른 매뉴얼은 어젯밤 상당히 번민했었다. 몇 개월 만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고, 몇 개월 만에 애틋한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을 맺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미성년자를 건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매뉴얼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와중 퍼블리가 패치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것이 생각나 둘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둘이 사귀는 사이라면 매뉴얼과 패치가 성애적인 관계였다는 것은 배제되는 선택지였기에. 하지만 바람이라니.
“호호, 걱정마셔요! 저도 둘 사이가 수상쩍어서 물어봤더니~ 아무 사이 아니라구 하드라구. 그냐앙~ 엄청 가까운 동료 사이라나?”
“그럼 혹시, 패치....가 저희 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줬었나요?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던가요?”
매뉴얼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물었다. 사귀는 사이라고 그녀가 대답을 한다면 매뉴얼은 기꺼이 연개부 직원들이 그를 평소에 부르는 ‘금수야인짐승’ 의 타이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구.... 짝사랑이라고 하던디?”
왐마야.... 매뉴얼은 그제야 몸에서 힘을 쫙 뺐다. 다행히도 범죄자의 길에서는 벗어났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온 걸 보니 매뉴얼씨도 패치 총각이 좋아서 간호하러 온 거겠지? 어제도 왔다매요.”
어제 처음 본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그녀의 표정에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해 매뉴얼은 네, 뭐... 하며 말을 흐렸다.
“그래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여기 병원 설비가 쫌 좋아요? 금방 나아질 거에요. 간호사분들도 예후가 좋다고 했구.”
“....감사합니다.”
“둘이 사귀면 그림 좀 되겠네. 둘 다 인물은 훤-해가지고!”
매뉴얼은 흘깃 패치의 얼굴을 훔쳐봤다. 거즈를 치우면 훤-한 얼굴이 드러나는 건가? 상상은 잘 가지 않았지만 19금 마을 사람들은 자타 공인 ‘아름다운’ 종족이 아니던가. 지금은 알아보지 못해도 패치 역시 그쪽 출신이면 꽤나 미남일 것이다. 그러려나.
4.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꾸준히 스트레칭하시고요."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온 매뉴얼은 습관처럼 담배를 찾다가 곧 그만두었다. 이 이후에도 누워있는 그 사람을 보러 갈 것인데, 중환자실 병실에 들어가면서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도 좀 아니다싶었다. 대신 매뉴얼은 심심한 손으로 노트북을 켰다. 패치라고 검색을 해보자 수호대원 패치. 매뉴얼 패치. 검은 금요일 복구 같은 연관 검색어들이 좌르륵 떴다. 그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매뉴얼은 이미지 섹션에 들어갔다. 그냥 훤한 얼굴이 뭔가 싶어서, 궁금해서 그랬다.
"얜 왜 표정이 이렇냐."
하지만 생각만큼 괜찮은 이목구비 보다도, 19금 마을 출신치고는 특이한 눈 색이나 치아의 형태보다도 매뉴얼의 이목을 끈 것은 한결같이 뚱한 그 사람의 표정이었다. 조금쯤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해도 될텐데, 검은 금요일 희생자들의 화환을 받는 자리에서도, 그가 구한 사람들을 만나며 찍은 기념사진에서도, 패치의 표정은 한결같이 무뚝뚝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봐줄만한데.... 표정이 이러니까 무슨, 화난 감자같네."
매뉴얼은 자기도 모르게 큭큭대다가 느린 한숨을 뱉었다. 패치와 퍼블리, 두 영웅의 이야기는 모든 포털에서 대서특필되어있었다. 기사 사진에 나온 잔뜩 굳은 얼굴이 아닌 그의 진짜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매뉴얼이 그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패치가 깨어난 후가 더더욱 기대되었다. 그 뚱한 얼굴의 이면이, 패치의 화난 얼굴이나 우울한 얼굴이나 웃는 얼굴 같은 것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얘를 좋아하는건 아니고..."
괜히 찔려 매뉴얼은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두번 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해. 고맙기는 해도... 젊은 것이 표정이 벌써부터 세상 다 산 중늙은이 같아서 그래. 설치되어있던 동안 나이를 먹지 않은 매뉴얼과 패치는 이제 거의 나이차가 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뉴얼은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5.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잡힌 피고인은 법정으로 연행되었다. 수호대 내의 크고 작은 사건을 처리하는 크레인이 친히 이번 재판에 참석했다. 설치되었다가 돌아온, 패치와 안면이 있는 용검전설의 배우들이 재판 방청석을 꽉 채웠다. 크레인이 힐끗 돌아본 자리에는 퍼블리가 전서구의 옆에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친 퍼블리가 힘겹게 웃었다. 두 눈이 새빨갛다.
피고는 지난 12월 19일 트럭을 몰고 인도로 직진 주행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레이크를 밟거나 우회하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도쪽으로 방향을 튼 후에 더욱 속력을 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피고인은 본 사건에 대한 고의성을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복구의 주역인 수호대 소속 패치 팀장이 사망에 준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본인을 변호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말에 따르자면 국선 변호사 마저 거절하고 단신으로 법정에 서겠다고 했던 것 같다. 크레인은 조용히 분노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이 싫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 그 감정은 동족혐오에도 가까운 것일테지만 그 목적이 달랐다. 목숨의 가치에 경중은 없다지만 행동에는 경중이 있다. 모든 혐의를 인정했으니 범인은 살인미수 범위 내에서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고인측. 최후 변론하십시오."
판사가 피곤한 미간을 누르며 말하자 소란스러웠던 재판장이 조용해졌다. 이번에도 피고인은 별다른 말을 안하고, 그 동기도 밝히지 않고 사라질것인가. 크레인의 꽉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피고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다리던 판사가 법정을 폐회하기 위해 입을 열 찰나, 피고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상태로 살아나고 싶지 않았어."
"피고인. 더 크게 말씀하세요."
"나는...! 살아나고 싶지 않았다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던 법정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살아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검은 금요일 전에도 간신히 간신히... 간신히 살고 있었던 거, 하루 하루 살면서 매일 내일 세상이 끝나기만을 바래왔었는데...! 가족도 친구도 검은 금요일 훨씬 이전에 이미 다 죽었고, 나 자신은 죽을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난 차라리 세상이 끝났으면 했었어...! 그런데 나를 다시 살려? 게다가 기억까지 불완전하게...? 복구 후 2년간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아? 소중한 사람이 있는건 기억나는데 이름도! 얼굴도! 함께 했던 모든, 모든 순간을 다 잊어버렸다고! 내 인생에 남은건 이제 불행한 기억밖에 없다고..! 그 상태로 나를 살린건 날 두번 죽이는거나 마찬가지라 그 사람이 미웠어, 미웠다고! 죽이지 못한게 한이야, 2년간 내 고통을 생각하면...!"
"개소리하지마!"
방청객에서 큰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인, 복구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소녀에게로 쏠린다.
"죽을 용기가 없었다고? 다른 사람을 죽일 용기는 있었으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무시했어야했다는거야? 흡수당해서, 갑자기 덮친 재해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구하지 말았어야했던거야?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팀장님이....!"
"정숙하세요!"
흐어엉, 퍼블리가 큰 울음을 터트리고 전서구가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법정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법정의 술렁임이 한동안 가라앉을 기미가 없자 판사가 다시금 의사봉을 두드린다.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판사가 한숨을 쉬며 휴정을 선포하려고 할 때에, 누군가가 판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말했다. 어떤 소식을 전달받은 판사가 한 순간 놀란 얼굴을 하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번 재판은 연기합니다. 피해자가 사망하여 피고인은 살인 미수가 아니라 살인죄로 기소될 것입니다."
7.
장례식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에 치뤄졌다. 영웅의 장례식인만큼 아주 으리으리한 분향소에,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매뉴얼도 그 중 한명이었다.
"...괜찮나."
"그러엄. 괜찮지."
한 대만. 담배연기를 내뿜는 크레인에게 매뉴얼이 그렇게 부탁하자 그는 잠자코 담배를 건네준다. 하지만 매뉴얼이 뻔뻔하게 불까지 요구하자 과연 이번에는 크레인의 눈이 찌뿌려진다.
"자네, 담배도 라이터도 항상 가지고 다니지 않았나."
"뭐.... 저 녀석 병실에 갈 때 담배 냄새 풍기면 안될거같아서, 근데 눈에 보이면 더 한 까치 빨고 싶으니까 치웠수다."
"자네 역시 안 괜찮군."
멀리서 캐롤도 울릴 법 한데. 장례식장에는 곡소리며 기자들이 몰켜다니는 소리 탓에 그런 로망은 묻혀진지 오래다. 매뉴얼은 대답없이 어깨만 그냥 으쓱했다. 괜찮지. 괜찮아.
"직접 얘기도 못해본 상대인데. 그 며칠 사이에 사랑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다만, 기억이 없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하는지 괴로워해야하는지 모르겠어. 그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난 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게 힘들군."
매뉴얼이 하하, 하고 힘빠진 소리를 내며 크레인이 빌려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자 흐려진 연기 사이로 아까 보았던 영정 사진이 떠올랐다. 모바일 부서 팀장일때 찍었던 사원증의 사진이었다지. 신문에 났던 것과 변함없는 뚱한 얼굴에 입맛이 썼다. 아니 원래 담배는 쓴 맛이었나.
"웃는 얼굴 못 본 거, 고맙다고 못한 거, 그거 두개만 아쉽네...."
그 말에 크레인도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0.
그 기억은 전조증상 없는 해일처럼 매뉴얼을 덮쳐왔다. 뻔한 일일연속극, 신파 드라마에서 보는 것 같은 극적인 전환점은 없었다. 잊고 있었던 사람의 얼굴을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으로 매뉴얼은 다시 기억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꼬맹이. 무슨 말을 해도 바락바락 대들던 그 얼굴. 햇빛을 받으면 더 파랗게 보이던 그 눈이,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매뉴얼에게 말을 걸던 참새같은 모습이. 쭈뼛대며 공을 좀 구해줄 수 있냐고 묻던 목소리가, 마치 밀물이 몰려오듯 한꺼번에 기억이 덮쳐왔다.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우욱 하며 울음을 삼키던 얼굴, 호바박 뛰어가던 뒷모습이. 그리고 공을 건내줬을 때나 아주 가끔 사소한 일에 칭찬을 했을 때 웃던 얼굴이. 그 미소가. 늘 날서 있던 눈썹이 슬쩍 내려가고 쑥스러운 듯 상어이빨을 드러내고 웃던 얼굴이 마치 어제 일 처럼, 그 기억들이 해일처럼 매뉴얼을 덮쳐 그는 필연적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아, 벌린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는 것도 모르고 매뉴얼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기억에 한동안 뚫려있던 가슴속 어떤 예민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다시 채워졌다. 채워져서 답답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속에 뭔가 얹힌 것 같이 괴로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도 매뉴얼은 떠올릴 수록 아파오는 꼬맹이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되새김질했다. 주인공님들의 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에 매뉴얼은 제 기억의 부활을 감싸안으며 몇번이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는, 다시는 너를 잊지 않겠노라고.